▲ 1988년생. 2001년 분당 서현초등학교 졸업. 2004년 분당 서현중학교 졸업. 2007년 명지외고 졸업.
“제가 좀 바쁘거든요. 저녁 시간에 제가 있는 곳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수화기 너머 임준서(19)군의 목소리에는 별로 여유가 없었다. 7월 초, 대부분의 예비 유학생이 가장 한가할 시기인데도 그는 무척 바빠 보였다. 7월 4일, 어렵게 약속을 잡고 그가 일하고 있다는 서울 역삼동으로 향했다.
올 2월 명지외고를 졸업하고 9월 브라운대에 입학하는 준서군은 요즘 한창 ‘아르바이트’ 중이다.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필수 관문인 SAT 시험 대비법을 정리한 책의 공동저자가 된 것. 민사고 졸업생을 비롯, 방학을 맞아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대학생 선배 등 10여명과 함께 부문별 SAT 공략 요령을 집필하고 있다. 오는 8월 출간 예정인 이 책에서 문법과 작문 부문을 맡고 있는 그는 집필을 위해 7월에 예정돼 있던 브라운대의 서머 프로그램 신청도 취소했다. “공부하다 보니 후배들에게 정리해 주고 싶은 게 생겼고, 그걸 책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는 게 집필에 참여하게 된 이유다. 그 ‘명분’을 지키려 그는 벌써 몇 달째 아침 9시경 출근하고 밤 10시 넘어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준서군은 명지외고 1기 졸업생이다. 명지외고는 유학반 시스템이 잘 갖춰진 여타 외고와는 달리 국내 대학 진학 위주로 커리큘럼이 구성돼 있다. 그래서 그를 포함, 해외 유학을 준비한 학생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유학반이 따로 없다 보니 그도 1학년 때까지는 국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수능시험을 준비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유학 가면 어떻겠냐고 운을 뗐을 때도 시큰둥했다. 그러나 1학년 말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나라 입시는 오로지 수능 점수만으로 개개인을 평가하잖아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제가 생물을 좋아하는데 1년 정도 공부하다 보니 너무 시야가 좁아지더라고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영역에서 몇 점 올릴까’하는 것만 생각하게 되고요. 외국 대학에서는 점수뿐 아니라 인성까지 평가해준다고 들었고 기왕이면 그런 곳에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학년 되자마자 방향을 틀었죠.”
준서군은 유학을 준비하기 전 아이비리그에 무슨 대학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번에 진학하게 된 브라운대도 ‘그런 학교가 있었나?’ 했을 정도로 사전 지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유학 가겠다고 가족에게 선전포고한 후 혼자서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미국 대학 순위를 보고 학부 랭킹 1위 학교인 프린스턴으로 목표를 잡았다. 처음 챙긴 것은 내신성적 관리. “정말 열~심히 했어요(웃음). 저는 몰랐는데 나중에 후배들이 그러더라고요. ‘선배 그때 진짜 폐인 같았다’고. 특히 고3 올라와서는 내신에, SAT에, 과외활동까지 병행해야 해 정신이 없었어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24시간을 빈틈없이 쪼개 쓰게 되더라고요. 점심 먹으러 줄 서는 시간, 화장실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단어장을 들고 다녔을 정도니까요.” 그나마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환교수로 발령 받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 시애틀에서 1년간 지내다 왔다. 이후에도 꾸준히 영어에 대한 감을 익혀 또래들보다 영어는 꽤 잘하는 편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긴 했지만 결과에 아주 흡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 목표로 삼았던 프린스턴대 수시전형에 응시했다 실패했고, 수능 직후 친구들이 자유를 만끽하던 연말 2개월여를 꼬박 할애해 원서를 작성했다. 응시 대학만 16개였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 브라운을 포함해 6곳에 합격, 2곳은 대기자 합격, 8곳은 불합격이었다. “결과 발표일이 올 4월 1일을 전후해 몰려 있었거든요. 떨어진 학교에 대한 충격 때문에 합격 사실을 기뻐할 여유도 없었죠, 뭐.(웃음)”
그러나 재학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브라운의 학풍은 호기심 많은 그의 성격이나 공부 스타일과 썩 잘 어울렸다. 작년 부모님과 함께 했던 미국 대학 투어에서 임군의 어머니가 제일 마음에 들어 했던 학교 역시 브라운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정해놓았다. “시험 준비하면서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영어는 굉장히 분명한 언어여서 하나의 문장을 백이면 백 모두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말에는 이중성이 많아요. 딱딱한 글보다는 시에 더 잘 어울리죠. 제 생각에 언어의 차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뇌 구조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상관관계를 연구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임군의 ‘공부 시나리오’는 신경학과 생물학, 언어학, 그리고 심리학까지 망라한다.
그가 유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라’는 것. “저는 늦게 시작한 데다 마음만 급해 그때그때 필요한 게 닥치면 준비하는 식으로 공부를 해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여유를 갖고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하고 유학 관련 정보를 많이 보유한 인터넷 커뮤니티나 전문가, 선배를 찾아가 이야기도 많이 듣는 게 좋습니다. 단,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한쪽 입장에 치우치지 말고 형평성을 유지하도록 하세요. 듣기 좋은 말 해주는 사람 말만 들으면 자칫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으니까요.” 건강관리도 중요하다는 게 그의 귀띔. 그는 스트레스 받으면 굶고 밤에 친구들과 치킨이나 라면 등을 먹는 생활을 반복해 몇 년 새 체중이 15킬로그램이나 불었다. 공부하느라고 건강을 챙기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쉽다. 그래서 요즘 그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 한 번은 꼭 집 근처 공원을 30분간 산책한다.
작년 여름, 준서군은 과외활동의 일환으로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아 가톨릭대에서 인턴십 활동을 했다. 당시 그는 연구실에 앉아 우연히 펴본 의대생의 교과서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제가 보기에 책 내용이 완벽하지가 않았어요. ‘A라는 현상이 있다’는 말만 있지 그 현상의 메커니즘이나 적용 방안 같은 건 제대로 설명이 안 돼 있더라고요. ‘아, 나중에 내가 공부해서 끼어들 여지가 있구나!’ 싶었죠.” 그의 꿈은 ‘의사들이 오래도록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이나 이론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브라운에서 다양한 공부를 마친 후, 학교를 옮겨 의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고 나중에는 노벨생물학상도 받을 생각이란다. 그의 말을 빌리면 ‘제대로 된 공부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는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고 공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를 쓰라’는 원서 항목 때문에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친구들은 그에게 ‘중독성 있는(addictive)’이라는 형용사를 선물했다. 같이 있으면 마음 편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어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라는 의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준서군 주변에는 친구와 후배들이 늘 많다. “비결이오? 그냥 얘기 잘 들어주고 웃어주는 거요.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힘을 줄 수 있거든요. 제가 힘들 때 친구들에게 그렇게 도움을 얻은 것처럼 저도 그런 친구, 그런 선배가 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