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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스알파 2012.06.29] 박하식 경기외고 교장, 가는 곳마다 ‘신화창조’
이름
관리자
등록일
2012-07-13

교육리더] 박하식 경기외고 교장
젊지만 화려한 실적으로 학생들에게까지 알려진 스타교장
민사고 외대부속 경기외고 세 개의 신화로 우뚝
박하식(55) 경기외고 교장은 올해 경력 5년 차의 젊은 교장이지만, 국내 교육판도에 그은 궤적은 화려하다. 국내교육의 국제화를 향한 기틀을 만들고 질을 업그레이드 해온 선봉장으로 교육업계 관계자들뿐 아니라 학부모나 학생들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진 ‘스타교장’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아이비리그 최고의 산실’ 민사고의 토대를 만들었고 전국단위 자율고로 전국 수위를 넘보는 한국외대부속용인외고의 설립을 주도했다. 현재 몸담고 있는 경기외고 역시 고교입시체제 변화로 학생선발이 경기권에 묶이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내고교 최초 IBDP 도입, 괄목할 대입실적으로 경기권 외고의 정상권에 올라선 상태다. 화려해 보이는 박 교장의 진면목은 역전의 승부사라는 데 있다. 박 교장 이전의 민사고는 파스퇴르 부도 직후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부임 전 명지외고는 입시부정 연루, 재정적 어려움이 겹쳐있었다.
박하식 경기외고 교장은 민족사관고와 외대부속용인외고에 국제반 시스템을 도입하고 경기외고를 경기권 최고 학교로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켜온 명문고 메이커다. ‘고교판 마이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박 교장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사진=정수원 기자 blog.veritas-a.com/jsoowon27
‘선수’ 박하식, 가는 곳마다 ‘신화 창조’

[베리타스알파 = 김경숙 기자] 박하식 교장의 명성은 강원 횡성의 민족사관고에서 시작됐다. 박 교장이 민사고에 부임한 건 민사고의 모기업인 파스퇴르가 부도로 인해 야쿠르트로 넘어가기 전인 97년의 봄. 부임 때만 해도 괜찮았던 민사고는 97년 말부터 재정문제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당면문제는 내신불이익으로 인해 서울대 진학이 어려워지면서 위협받는 학교위상이었다. 꺼져가는 민사고의 부활은 해외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던 게 결정적이었다. 민사고의 ‘민족 정신으로 무장한 세계적 지도자 양성’이라는 설립 목표는 박 교장의 손을 거쳐 ‘글로벌 인재 교육, 글로벌 리더 교육’으로 다듬어져 갔다. 민사고는 이후 아이비리그 최다 배출학교로 올라섰고 현재 해외대학 진학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입지를 굳혔다.

물론 민사고의 신화는 박 교장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민사고 존재 자체가 흔들렸던 당시 해외대학 진학커리큘럼을 만들어 실행하고 업그레이드하면서 실적을 만드는 과정을 주도했다고 평가 받는다. 해외진학을 위한 토대는 미국 사회에 우리고교를 알리는 게 우선이다. GPA SAT AP 점수에 해당고교에 대한 인지도가 진학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박 교장은 민사고 학생들과 함께 두루마기를 입고 미국땅 한복판을 휘젓고 다녔다. 크디 큰 땅에 대한민국 강원도 시골에 자리한 민사고의 존재감을 알리는 당찬 이벤트였다.

99년 봄, 박 교장은 경기 용인에서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민사고 시절 두루마기에 이어 이번엔 앙드레김표 교복이다. 박 교장은 “세계적 학교엔 세계적 디자이너의 교복이 어울린다”고 당시 분위기를 술회한다. “가장 품위 있는, 가장 편안한 교복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 앙드레김 선생을 만나 취지를 설명했고, 선생도 최선을 다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만든 게 바로 외대부속용인외고의 교복이다. 3월3일 입학식 때 학생들에게 입혀야 했었는데, 교복이 학교에 도착한 게 3월2일 밤 11시경이었다. 넥타이 맬 줄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밤 늦게까지 방마다 돌아다니며 넥타이를 매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앙드레김 교복은 당시 용인외고 학생들 자긍심의 표상이었다고 기억한다.”

2008년 가을 박교장이 주도하는 혁신의 물결은 경기 의왕으로 저변을 넓혔다. 바로 경기외고다. 옛 명지외고 시절을 기억하기 힘들 만큼 경기외고의 환골탈태는 눈부셨다. 박 교장 부임 직전 명지외고는 입시문제 유출로 학교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외고로서의 정체성이 불분명했던 명지외고는 50대 초반의 젊은 교장의 부임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교육그룹 대교의 지원도 있었지만 5년 사이 경기외고의 위상은 혁신의 아이콘 박 교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게 중론이다. 학교법인의 상징인 암적색 봉황의 GAFL 로고를 경쟁학교들이 ‘개뿔’이라고 부를 만큼 집중되온 시샘은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는 세계 TOP 7 학교’를 겨냥한 경기외고의 현재를 반증한다.
서른 명의 한국인, 미국에서 도포자락 휘날리다

박 교장의 어릴 적 꿈은 목회자였다. 신학대학에 입학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 부모님 반대로 숭실대 철학과에서 학부과정을 마쳤고 연세대에서 교육행정 석사, 고려대에서 교육과정 박사를 수료했다.

81년 영락중학교에서 도덕선생으로 출발한 박 교장의 터닝포인트는 강남 한복판 현대고에서의 10년이다. 박교장은 87년부터 96년 말까지 현대고 재임기간 동안 열정으로 뭉친 동료교사들과 함께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 “현대고에 우수한 선생들이 많았다. 30대 초반 선생들을 중심으로 자발적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외국학교와 외국교육에 대한 공부를 함께 했다. 사례연구를 하는 멤버에 강익수 선생(현재 북일고 교장)도 있었다. 당시 연구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우리교육의 국제화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박 교장은 민사고의 교사모집 광고 앞에 고민에 빠졌다. “95년 당시 현대고 선생들과 함께 ‘우리교육을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실현하는 학교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교사 모집광고에서 선생들에 대한 급여가 두세 배로 많다는 사실도 획기적이었다. 급여가 많다는 금전적인 이유가 아니라 선생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통해 설립자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학생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 역시 10년 간 현대고에서 꿈꾸고 바라던 것들이었다.”

민사고는 96년에 개교했다. 박 교장으로선 서울을 떠나 산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이 있었다. 좋은 학교인 줄은 알았지만 마음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박 교장을 찾아와 민사고로 마음을 돌리려 애쓴 인물이 김형섭 민사고 교감(전 한국조리과학고 교장)이다. “현대고에서 함께 공부하던 멤버 중 한 명인데, 민사고 가자마자 교감이 되었다. 나보다 젊지만, 창의적이고 기발하고 시대를 잘 읽어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을 교감으로 발탁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세 번째 찾아 온 김 교감이 권해 이뤄진 민사고 설립자인 최명재 회장과의 면담에서 박 교장은 생각이 바뀌었다. “5분 가량의 짧은 시간이었다. 그 분의 얘기를 듣고 감동했다. 70대 고령인 최 회장 말씀이 ‘나는 작은 회사의 사장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나라가 살 길은 교육밖에 없다. 작은 회사 운영하지만, 민사고를 세워 운영해 이걸 갖고 우리나라 교육을 바꾸고 싶다’라는 최 회장은 선생인 나보다 확고한 교육철학과 우리교육을 생각하는 강한 열정이 있었다. 그래서 감동했고, 결국 민사고로 가게 되었다.”
민사고에 가자마자 힘든 일들이 많았다. 전국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했지만, 1기 30명 중 11명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내신대란이다. 민사고처럼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의 학생들에겐 불리한 내신 때문에 서울대 가기 힘들어 자퇴행렬이 줄을 잇던 때다. 박 교장이 민사고로 자리를 옮긴 건 97년 2월인데 그해 말 전면무상교육을 기치로 지원을 해오던 학교의 모기업 파스퇴르가 부도났다. “사연 많은 시절이었다. 2기가 입학했지만, 불리한 내신 때문에 불안해했다. 내신대란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전면무상교육에 선생대우가 좋아서였는데 후원기업이 부도가 나니 사정은 뻔하지 않은가. 선생들이 무보수로 근무하고 나병률 선생(현 김천고 교장)과 교사 공동대표로 난국을 헤쳐나갔다.”

어느 정도 수습되어 설립자가 돌아와 새로운 전략목표를 제시했다. 학교 광고를 역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핵심은 ‘서울대 가려 하는 학생은 민사고 오지 마라’는 역발상이었다. “그때 설립자와 같이 방향 설정한 게 ‘민사고는 서울대 보내는 학교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학 보내는 학교’였다. ‘재정위기를 기회 삼자’ ‘서울대 못 가게 된 현실을 오히려 기회로 삼자’. 98년에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7월에 최 회장이 국제반 개설 프로젝트를 나한테 줬다. 미국대학은 어떤 프로세스로 가게 되는지 스터디하고 전문가의 자문 받고 선생들끼리 워크숍하면서 확신이 섰다. 국제반은 5명으로 98년에 시작했지만 워낙 우수한 아이들이라 세 달 준비해서 그 해 코넬대 합격자를 냈다. 영어를 잘하던 그 학생만 민사고 1호 아이비리거로 조기졸업시켰고, 나머지 네 명은 좀더 다듬어 콜롬비아 MIT 등 아이비리그에 모두 합격시켰다. 세 달 준비해서 갈 수 있구나, 이거 되는 일이구나, 확신이 섰다.”

해외대학 진학에 성공한 민사고의 전략은 바로 실력을 승부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SAT를 잘보는 것이 1차였고, AP인증을 받는 것이었다. 99년 당시 민사고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AP인증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토플 갖고 유학 가던 시절이었다. 미국학생들과 바로 경쟁할 수 있도록 SAT와 AP를 준비했다.” 더 어필할 수 있었던 건 우수한 한국아이들이란 사실 자체와 한복을 입고 미국의 국제적 교육을 받는다는 강한 인상이었다. “민사고 아이들 데리고 두루마기 휘날리며 아이비리그를 순방했다. 생각해보라, 미국 한복판에 동양인 서른 명이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대원외고도 비슷한 시점에 외국대학 진학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내신대란 때문이다. “대원외고의 성장동력도 민사고와 마찬가지였지 않나 싶다. 10년 전 불어닥친 위기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무수한 고민이 두 학교를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학교로 성장시킨 것이다.” 97년 봄 민사고에 부임해 학교의 위기와 파란을 함께 넘긴 박 교장은 99년 1월4일부터 교감직에 올랐다.
‘최초’ ‘최고’ 신화 일궈낸 용인외고 시절

박 교장은 2004년 8월10일부터 외대부속용인외고 개교준비 책임교감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외대부속용인외고는 당시 한국 최초의 관학 협력 학교로 남봉철 대원외고 교장과 박하식 민사고 교감을 교장 교감으로 영입하면서 개교 전부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학교다. 남 교장 역시 박 교장이 개교준비 책임교감으로 있으면서 영입해온 인물이다.

“당시 외대 실무자들이 나한테 기본적 계획이 있느냐 물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건 포지셔닝이었다. 1년 전 명지외고가 같은 경기권에 들어서있던 상태여서 포지셔닝은 더욱 중요했다. 외대 실무자들은 ‘외고 가운데 3~4위 되면 좋지 않겠느냐’ 했지만, 난 그럴 거면 안 할 거라고 했다. 이왕 할 거면 외고 중 가장 좋은 외고 해야 하지 않겠나.”

외대부속용인외고가 목표한 포지셔닝은 최고의 외고였다. 박 교장은 개교준비 책임교감이 된 다음날부터 전국을 돌아다녔다. 학교설명과 홍보를 위해 전국의 중학교들을 다녔다. 용인외고 신입생들은 입학도 하기 전 합숙하며 함성을 지르고 다녔다. “2005년 1월1일 학교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입생들을 교육했다. 6주 프로그램이었는데, 용인외고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라 당시 용인외대 캠퍼스의 열악한 환경의 기숙사에서 학생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일부터 했다. 아이들 데리고 용인외고 터에 올라가 함성을 지르곤 했다. ‘할 수 있다!!’ ”

결과는 좋았다. 박 교장이 개교준비를 위해 밤낮 없이 일했던 용인외고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자마자 단번에 국내 최고 수준의 학교로 성장했다. 국제반은 하버드 2명을 포함해 전원 해외 유명 대학 진학에 성공시켰다. 국내반 역시 일본 와세다대 5명 합격을 포함해 7개 학급 215명 중 213명이 국내대학에 진학했다.

박 교장이 당시 만들어낸 용인외고의 교육커리큘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성과를 일궈내고 있다. 박 교장은 당시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정규과정인 ‘RT(Regular Track)’와 방과후 수업인 ‘ET(Elective Track)’, 두 축의 커리큘럼을 구축했다.

영어몰입수업도 눈길을 끌었다. 국어와 국사를 제외한 전과목을 영어로 수업하고, 교재는 원서를 사용해 AP까지 대비하게 했다. 전교생이 매주 1-2회 에세이를 쓰고 writing on line 프로그램을 통해 원어민으로부터 첨삭지도를 받게 했다. 글로벌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인성교육에도 힘썼다. 심신을 발달시키고 조화를 이루도록 1인1악기, 1인1체육을 1년 간 무료로 실시했다. 봉사활동시간수가 150시간 이상이어야 하는 ‘글로벌리더 인증제(HASFLeadership Certificate)’도 박 교장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모두 사교육 없이 국내대학 입학사정관제는 물론 해외대학 진학에 밑거름이 될 학교교육이며, 요즘은 ‘한다 하는’ 학교는 모두 벤치마킹해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다.
경기외고서도 박하식표 신화는 ‘현재진행중’

박 교장의 신화는 현재진행중이다. 박 교장은 나이 50을 넘기면서 2008년 9월 교장이 되었다. 교장으로선 비교적 이른 나이다. 박 교장을 영입한 학교는 바로 경기외고. 옛 명지외고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제일 먼저 모셔온 인물이 박 교장이다. 박 교장 영입만으로도 경기외고는 외고권 초우량 유망주로 거듭났다. 경기권 외고, 하면 경기외고부터 떠오를 정도다.

박 교장은 명지외고의 교명을 경기외고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또 다른 신화를 준비했다. 부임하자마자 도입한 프로그램은 진학 지도 시스템인 Career Planning Program과 국제 표준 교육과정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Diploma Program이다.
Career Planning Program은 학생이 자신의 생애를 설계해가는 프로그램이다. 입학 전에 자신의 진로적성검사 결과를 가지고 담당 컨설턴트와 미래를 설계한 후 심리검사를 통해 학생의 장래희망이 적성과 흥미가 매칭되는지 점검한다. 해당 직업 종사자와의 멘토시스템도 도입한다.

국제 표준 교육과정인 IB Diploma Program은 국내고교 최초로 경기외고가 도입한 국제적 교육과정이다. “IB Diploma는 전세계 130여 개국 2300여 개 학교가 도입한 교육프로그램으로 대학 학문 수행 능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학을 준비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수능준비 등 국내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에 할애하고 방과후에 강도 높은 별도의 공부를 하고 있다. IB Diploma는 영어권 학생들이 자국어로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정을 우리나라에도 도입, 유학을 희망하는 국내 학생들의 짐을 덜어주는 교육과정이다.”

박 교장이 인터뷰중에 했던 말은, 사실 눈길을 끄는 ‘실적’과 ‘혁신’에 관한 얘기보다는, 우리교육이 가야할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박 교장은 “학교를 블랙박스에 비유한다. 많은 학생들이 입학하고 졸업하는 중고등학교의 3년 동안,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관심은 없고 오로지 상급학교로의 진학결과만 관심을 갖고, 이런 잣대로 학교를 평가하는 것이 관행”이라며 “이제 학교교육의 일거수일투족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왔다. 이런 기회의 시기를 맞아 단지 경쟁에서 생존한다는 소극적인 생각에서 더 나아가 학교를 좋은 학교로 만들기 위해 모든 교육 공동체가 함께 노력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 교장은 자신의 저서에서도 결과보다는 과정에 대한 생각, 과거보다는 미래에 대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다. 2006년 발간한 ‘이젠 세계인으로 키워라(글로세움)’는 외대부속용인외고 교감 시절 쓴 책이고 2009년 가을에 나온 ‘좋은 학교를 넘어 위대한 학교로(글로세움)’은 경기외고 교장으로 부임 후 썼다. 학교의 지명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타이밍을 잡았던 두 권의 책은 특히 글로벌 시대의 교육이라는 아직은 생소한 분야를 심도 깊게 파헤치고 앞으로 어떤 교육을 해야 할지, 2010년부터 도입된 ‘학교선택제’와 함께 시작된 학교경쟁 시대에서 학교가 펼쳐 나가야 할 교육에 대해 풀어냈다. 글로벌 시대, 학교경쟁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가 해나가야 할 교육에 관한 책이다. 두 권의 책은 이룬 것보다 여전히 남은 박 교장의 숙제를 보여주는 셈이다. 세 개의 신화에도 ‘여전히 배고픈 사람’. 박하식 교장의 열정이 보여줄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inca@verita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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